메이커의 정의를 넓혀보기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사람을 '메이커(Maker)'라고 한다. 이 용어는 실리콘밸리뿐 아니라 기술과 창업 생태계 전반에서 널리 사용된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앱을 개발하거나 혁신적인 제품을 설계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회사에서는 보통 디자이너, 개발자 등 직접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메이커라고 부른다.

그런데 만든다는 것을 잘 살펴보면, 늘 어떤 지식 소비를 기반으로 한다. 어떤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는 모르는 것을 찾고, 학습한다. 다른 사람의 결과물을 참고하고, 접근을 따라하기도 한다. 즉,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지식을 적극적으로 탐색하고 소비한다.

관련해서 최근 엔지니어들과 일하면서 흥미로운 점을 관찰했다. 훌륭한 결과물을 만드는 메이커는 단순히 정보를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지식도 생산한다. 그리고 그 지식을 주변에 공유한다. 그래서 메이커란 단순히 제품을 만드는 사람을 넘어, 그 과정에서 지식도 만드는 사람인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시작하게 됐다.

메이커 임계점

커리어를 시작하는 시점에 우리 대부분은 지식 소비자다. 문서를 읽고, 튜토리얼을 따라가며, 다른 사람들이 만든 것을 따라 구현한다. 이 과정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오랫동안 타인의 통찰에 의존하다보면 항상 무언가를 뒤쫓는 기분이 들고 꽤 피곤하다.

그런데 어떤 시점이 되면 더이상 정해진 답을 찾거나 지식을 소비하지 않고 자기만의 지식을 생산하는데, 이를 '메이커 임계점'이라고 해보자. 이 임계점을 넘긴다는 것은 단순히 멋진 아티클을 작성하거나 컨퍼런스에서 발표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의 분야에 대한 지식과 근본적으로 다른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는 것을 뜻한다. 개발자가 처음에는 문서를 참고하며 기능을 구현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 과정에서 쌓인 통찰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안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특히 어떤 분야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도입하거나 의미 있는 기여를 한 사람들은 대개 이런 지식을 지속적 쌓아간다. 그리고 그 지식이 바로 그 사람의 전문성이 된다.

어떤 집단이 메이커 임계점을 넘겼을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오는지 생각하면 Apple이 떠오른다. 기존 UX 패턴을 단순히 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구현하기 위해 실제 사용자들을 관찰하고, 문제점을 파악하며 오랫동안 연구했다. Apple의 이런 혁신과 접근은 곧 업계 표준이 되었고, 다른 회사도 이 방식을 적극적으로 참고하며 새로운 제품을 설계하게 되었다.

오픈 소스 라이브러리를 사용하는 개발자들도 떠오른다. 시간이 지나면 개발자들은 자신이 사용하던 라이브러리의 한계를 만나고, 개선점이나 버그 수정을 하며 라이브러리에 직접 기여한다. 라이브러리를 소비하는 입장에서 직접 기여하는 생산자가 된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무언가 만들면서 한 깊은 학습으로 지식을 생산한다. 자율적으로 일하며 변화를 만들어낼 때 그 사람은 일터에서 연구자이자 실무자로서의 이중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나의 여정

처음 이 일을 시작했을 때, 나 역시 일종의 정답이나 청사진을 자주 찾아다녔다. 특히 한국의 테크니컬 라이팅 분야에서는 참고할 자료가 부족하고, 정립된 모범 사례나 성공 사례도 찾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초보자들처럼 기존의 패턴을 찾아다니며 때로는 레퍼런스 A를, 때로는 B를 따라하곤 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문서화 경험, 사용자 피드백, 실패한 시도, 성공적인 실험 등 흩어져 있던 지식과 패턴이 조금씩 쌓이고, 스스로 기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단순히 문서를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글쓰기 원칙을 만들고, 개발자들이 더 나은 기술 콘텐츠를 작성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이 지식을 확장 가능하게(scalable) 만드는 데 집중하게 됐다. 그래서 요즘은 내가 직접 문서를 더 많이 작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게 아니라, 내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이 문서를 쉽고 편하게 작성할 수 있는 방법을 설계한다.

오랫동안 지식을 소비하는 사람으로 지내면서 무척 답답하고 힘들었는데, 조금씩 주체적으로 접근하면서 훨씬 일하는 과정이 즐거워졌다. 이것이 어떤 변화인지 오랫동안 생각해 보니 일에 접근하는 방식이 이렇게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됐다.

능동적인 일의 주체가 된다는 것

이렇게 메이커를 지식 생산으로까지 확장하는 건 직장에서의 자율성과 만족도와도 더 강하게 연관된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1. 자율성: 지식을 생산하는 메이커는 단순히 솔루션을 구현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문제를 깊이 생각한다. 즉, 다른 사람의 지식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분야를 능동적으로 형성하는 자율적인 주체가 된다.
  2. 전문성 강화: 지식을 생산하는 행위는 선순환을 만들어낸다. 생산하고 공유할수록 더 많이 배우고, 새로운 도전을 해결하는 데 자신감이 붙는다.

하지만 단순히 커리어 발전이나 개인적인 만족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다. 내가 속한 팀, 더 나아가 커뮤니티의 지속 가능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식을 생산하는 사람은 팀과 커뮤니티 전체의 역량과 성숙도를을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메이커가 만든 지식, 통찰, 발견은 공동의 지적 인프라가 된다.

물론 소비자에서 메이커로의 전환은 항상 편안하지만은 않다. 미완성된 생각을 공유할 수 있고, 틀릴 수 있다. 아이디어가 완벽해지기 전에 세상에 내놓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내게는 그런 과정이다.

메이커를 위한 시스템 만들기

이런 관점에서 문서화 문화를 만드는 내 업무를 다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떻게 사람들이 문서를 더 많이 작성하게 할까'가 나의 핵심 질문일까? 그보다는 어떻게 사람들이 메이커 임계점을 넘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 것인가인 것 같다. 한 번 개발자들이 그 임계치를 넘어서면, 문서화나 지식 공유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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