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 속 일상, 인간성의 자리
몇 년 전 대학 시절 선생님을 만나서 이야기하던 중에, 선생님이 과거의 나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주연이는 대학생 때, 너무 나이브한 거야. 뭘 배우거나 알게 되면 세상이 정말 이렇다고요? 저렇다고요?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이러면서.. ㅎㅎ 그래서 얘가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때는 걱정이 많았지.’
웃음 반, 진담 반의 이야기였는데, 인류학자다운 정확한 관찰이었다. 대학 졸업 후 이젠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이런저런 경험을 했음에도 나는 아직도 사람들의 끝없는 악의나 인간답지 않은(?) 모습에 충격받고, 놀라고, 상처 입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두고도 주식 종목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든지, 자신이 겪는 어려움을 다른 사람을 혐오하는 것으로 푸는 사람이라든지..
그런데 지난 한 달 동안 일어난 일들을 보며 내 마음의 그런 영역이 점차 둔감해지는 것 같다. 전쟁이나 내란이라는 거대한 폭력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을 위험에 내몰기 위해 내린 결정들을 뉴스로 하나하나 지켜보다 보면, 인간은 예외적이 아니라 대체로 이렇게 악하고 약하구나 싶어 둔감해진다. 다른 존재의 죽음과 착취로 만들 수 있는 이익을 당연하게 추구하는 것. 나의 사적 이익을 위해 다른 인간에게 아주 손쉽게 폭력을 쓰려는 계획을 세우는 것. 그리고 그 폭력의 실패, 또 한 번 인간답지 않은 불복의 모습. 모든 장면이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래서인지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을 보고 나서도 주인공 펄롱의 이야기가 멀게 느껴진다. 예전이었다면 크게 감명받았을 내용이, 그의 결정이 좀처럼 와닿지가 않았다. 인스타 스토리에 뉴스를 올리는 것마저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는 내가 펄롱처럼 폭력에 놓여있는 사람을 데리고 내 가족으로 들여올 수 있을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나의 용기와 양심은 이제 어디에 사용되고 있는 걸까.
다만 펄롱이 계속해서 쉬는 가쁘고 답답한 숨에 깊이 이입했다. 예전에는 끔찍하고 괴로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 비일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일상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비극의 연속 가운데 이어지는 것인 듯하다. 특히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껴지던 민주주의가 당연하지 않다는 걸 뉴스를 보며 뜬 눈으로 지나던 12월 3일 새벽에 몸으로 체감했다. 내 자유와 인권도 신경쓰지 않으면 당연하지 않다는 것, 군인이 시민을 때리거나 죽여도 상관없었던 건 과거의 미개한 어느 시점의 일이 아니라는 것. 일상을 이루는 작은 소음과 장면이 하나도 당연하지 않다는 것.
영화에서도 이런 일상의 소음과 장면이 잘 나타나는데, 그중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곳으로 묘사되는 곳은 집 안, 부엌이다. 문을 닫고 들어오면 보이는 집의 복도가 그 연결 통로가 된다. 복도는 답답한 숨을 몰아쉬게 되는 집 밖의 일상과, 안온함과 함께 잠들 수 없는 집 안의 일상을 이어준다.
내면의 요청이란 한없이 연약한 것일 수도 있지만 깜짝 놀라울 만큼 질길 수도 있다. 한 사람의 의식이 변화하기까지의 치밀한 전투를 담아낸 소설 속 문장을 옮기기 위해 팀 밀란츠 감독이 개발한 이미지는 빌 펄롱의 집 복도에 있다. 화자의 심리와 윤리적 딜레마가 정확한 언어로 서술되지 않는 영화의 공백에 대처하는 방식으로 감독은 주인공의 거처를 공들여 짓고 현관문에서 부엌까지 이어지는 좁은 복도에 삼각대를 세웠다. 복도 숏은 한 사람의 사유 속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시각화하는 동시에 효과적인 반복을 위한 믿음직한 도구가 되어준다. 우리는 저녁에 귀가한 빌 펄롱의 뒷모습을 따라 복도를 지나면서 한 남자의 평온한 일상을 확인한다. 언제든 불을 밝히고서 빌을 기다리는 저 너머 부엌의 소란과 온기에 안심하기도 한다. 동시에 어떤 날의 복도는 더 이상 삶을 답습하고 싶지만은 않은 주인공을 짓눌러, 타인을 돕는 일에 기꺼이 나서도록 촉구한다. 그리고 마침내 빌이 소녀를 구출해 집으로 돌아왔을 때 복도를 통과하는 뒷모습은 한 사람이 아닌 두 사람이다.
—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우리의 가장 좋은 부분
그래서 김소미는 글에서 펄롱의 결단이 어떤 영웅적인 ‘희생과 헌신, 비장함’이 아니라고 이야기 한다. 대신 일상 가운데서 본 어두움에 눌리지 않고 삐져나오는 어떤 낙관, 마침내 가벼워진 마음이다.
키건의 묘사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맑고 부드럽다. 그는 여기서 무려 순진한 낙관을 언급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어떻게든 해나가리라”의 심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펄롱의 가장 좋은 부분이 빛을 내며 밖으로 나오고 있는 것일 수도 있을까?”
— [김소미의 편애의 말들] 우리의 가장 좋은 부분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낙관보다는 가장 나쁜 시나리오를 시뮬레이션하며 마음의 대비를 하는 안 좋은 습관이 있는 나에게, 여전히 낙관은 어렵다. 혹은 그런 “어떻게든 해나가리라”의 마음은 좀 더 내 시간과 공간을 다른 사람의 자리로 내어주겠다는 결정과 행동 후에 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상의 배경처럼 이어지는 폭력 가운데서 가쁜 숨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 어떤 임계점을 넘긴 인간성의 가장 빛나는 것이 튀어나온다는 원작 소설의 표현이 와닿는다. 실체가 불분명한 ‘대의’를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힘주어 옮기기보다는, 우리가 일상에서 스스로 가볍고 당당해지기 위해 어떤 인간성은 발휘된다고 영화는 말한다. 그것이 연약한 인간이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에게 한 학생이 문명의 첫 증거가 무엇인지를 물은 적이 있다고 한다. 예상과 달리 마거릿 미드는, 고고학 발굴 현장에서 찾아낸 1만5천년 된 인간의 ‘부러졌다 다시 붙은 대퇴골’이라고 답했다고. 부러진 대퇴골이 다시 붙기까지는 대략 6주 이상이 걸리는데, 그 시대에 대퇴골이 부러진 사람은 위험을 피할 수도, 물을 마실 수도, 사냥할 수도 없는 채로 맹수의 먹잇감이 되거나 굶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고. 그러므로 발굴된 대퇴골은, 다른 어떤 인간이 뼈가 부러진 동료의 곁을 지켰고, 상처를 싸매줬으며, 안전한 곳으로 동료를 데려가서 다 회복될 때까지 돌봐줬다는 증거다. 마거릿 미드는, 역경에 처한 누군가를 돕는 것에서 인류의 문명이 시작됐다고 대답한 것이다."
— ’돌봄’에 관한 단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