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learning)이라는 인프라

나는 학습을 인프라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학습은 보호 받으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감각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삶의 기반이다.

나는 학교를 좋아한다.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면 대다수가 경험하는 폭력적인 입시를 겪었지만 여전히 그렇다. 중학교 때는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짤을 분명 저장하긴 했지만.. 그런 규율과 억압의 기관으로서의 학교 안에서 다른 모습의 학교를 꽤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인데, 다른 사람에 비해 무척 운이 좋았다는 건 성인이 된 후에 알았다.

학교 연대기

겁이 많고 성취욕이 높아 모범생이긴 했지만, 실은 교과 성적과는 상관 없는 것들이 인간으로써 내 성장을 도와준다고 느꼈다. 다 같이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를 보고 이야기를 나눈 시간이라든가, 가출한 친구를 돌보던 선생님의 모습, 직접 학교 축제를 만들 수 있도록 축제 기획을 배우고 해냈던 순간 같은 게 학교에 대한 기억으로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있다.

학교에는 내게 자유를 주는 공간도 많았다. 언제든 열려있는 도서관, 도서관의 책들, 모여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복도 끝과 하교 길, 무한대의 감정을 나누는 친구들... 그리고 영화 <벌새>의 김영지 선생님처럼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선생님도 간혹 만날 수 있었다.

제가 아직 1학년생이었는데, 그것도 여자였는데, 그 도서관 출입을 허락받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자유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정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자유는 와이드너 도서관의 서가에서 누리는 특권입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무한히 늘어선 그 서가들에서 처음 밖으로 나왔을 때의 기분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약 스물다섯 권이나 되는 책을 들고 있어서 걷기도 힘든 지경이었지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 세상의 모든 글이 저기에 있고, 난 그 글을 읽을 수 있어. 자유입니다, 드디어, 주님, 드디어 자유예요! ... 지식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 <마음에 이는 물결>, 어슐러 르 귄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처음으로 캠퍼스를 걸어들어가던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캠퍼스 양 쪽에 학생들이 학교에 청소노동자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플랜카드가 걸려있었다. 그때 학교가 세상을 이해하게끔 돕고 학생을 보호하는 것 외에도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무척 안도했다. 나의 자유와 안녕 뿐만 아니라 타인의 자유와 안녕에 대해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대학교는 그런 차원에서 내게 새로운 시야를 열어 주었다. 훌륭한 선생님과 친구들 덕분에 '나'를 넘어 구조적 차원의 사고를 할 수 있게 됐다.

내 학력과 학벌이 개인적 노력의 결과라는 차원을 넘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도 똑바로 알게 됐다. 다만 내가 근본적으로 열심히 학습해서 얻고 싶었던 것은 어떤 혜택이나 상징 만은 아니었다. 알게된 것 만큼의 책임감, 그리고 그 책임감을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힘을 얻고 싶었다. 아직도 김현미 선생님 연구실에 붙어있던 문구가 생각이 난다.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 그리고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그 사이에는 잠시 덴마크에서 폴케호이스콜레(folkehøjskole)라는 학제를 경험했다. 그때 다녔던 학교에서는 특히 다양한 문화의 친구들과 함께 사는 법,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것, 다양한 문화 등을 학습했다. 스포츠를 즐기는 문화 속에서 움츠려 있었던 신체 활동의 감각도 새로 배웠다.

이렇게 다양한 학교에 다니는 동안 학교에서 나는 보호받는 동시에 자유롭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 자신을 구축하는 동시에 세상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거의 무한대의 기회를 매일 가지고 있다는 자유. 혼자가 아니라 함께 생각을 나누며 더욱 풍요로워지는 경험. 그래서 지금도 내가 가장 재밌어 하는 것은 같은 주제를 둘러싼 각자의 관점과 현장을 듣는 것이다. 학교에 다닐 때는 늘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학교를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같은 주제에 대해 자기 관점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친구들, 선생님, 그리고 공간과 시간 안에서 내 생각에 도전하며 고유한 관점을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도 '교육(education)'이 아니라 '학습(learning)'에 관심이 있다. 학습이 교육보다는 좀 더 자기 주도적이고 상호적이며 공동체의 관점에서 사람의 성장을 바라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습, 삶의 기반이 되는 인프라

사람들이 서로 배우고, 도전하고, 자기 자신으로써 관점을 넓힐 수 있는 경험은 학교 밖,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든 계속 필요하다. 그렇다면 학습이 이루어지는 환경을 인프라로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학교를 졸업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개발자들이 잘 학습해서 하려는 일을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나갈 수 있게 돕는 일을 한다. 이를 위해 텍스트를 사용하는 테크니컬 라이터로 시작했지만, 전반적인 학습 경험을 개선하는 일이 단순한 문서 작성 이상의 문제라고 생각하게 됐고 점점 학습 경험 전체를 돕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왜 나는 사람들의 학습에 관심이 많을까? 오래 고민을 한 결과가 바로 앞에서 설명한 일화들이다. 이 모든 경험 끝에 나는 학습을 인프라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학습은 보호 받으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감각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중요한 삶의 기반이다. 그래서 이 가치를 다시 일터에서 스스로 만들어보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Subscribe to jennwrites.xyz

Don’t miss out on the latest issues. Sign up now to get access to the library of members-only issues.
jamie@example.com
Subscribe